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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인생 이야기

고전영화 [차이나타운] 탐욕이 지배하는 땅,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by 영화감있게 살자 2025. 11. 2.

고전영화 [차이나타운] 탐욕이 지배하는 땅,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서론: 인상 평가

'차이나타운'이라는 제목은 듣는 순간부터 왠지 모를 이국적인 미스터리와 함께, 외부인이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금지된 영역을 암시하는 듯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님의 이 영화는 193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황량하고도 부패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사설 탐정이 얽혀드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통해 인간의 탐욕, 권력의 부패, 그리고 쉽게 변하지 않는 잔혹한 운명에 대해 탐구합니다.

 

이 느와르의 고전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세상의 모든 악이 결코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는 듯한 비관적인 시선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저에게 깊은 충격과 함께 오랜 사색을 안겨주었습니다.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팜므파탈, 고독하고 cynical(냉소적인) 탐정, 그리고 숨 막히는 서스펜스가 어우러져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섬뜩하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193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설 탐정으로 활동하는 제이크 기티스(잭 니콜슨 분)가 수도국장 홀리스 멀웨이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인으로부터 남편의 불륜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제이크는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사건을 파헤치고, 불륜 현장을 포착한 사진을 찍어 의뢰인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나 곧 '진짜' 홀리스 멀웨이의 아내 에블린 멀웨이(페이 더너웨이 분)가 나타나 제이크에게 항의하고, 제이크는 자신이 사기꾼들에게 속았음을 깨닫습니다.

 

제이크는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합니다. 그는 홀리스 멀웨이가 이전에 일했던 수도국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로스앤젤레스의 물 공급 문제, 그리고 거대한 개발 계획과 관련된 음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홀리스 멀웨이는 사실 의문의 사고로 이미 죽은 상태였고, 제이크는 에블린과 함께 진실을 추적합니다. 이 과정에서 에블린의 아버지이자 로스앤젤레스의 실세인 노아 크로스(존 휴스턴 분)가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건을 파헤칠수록 제이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합니다. 에블린은 홀리스 멀웨이와 노아 크로스 두 사람 모두에게 학대당했으며, 겉으로는 딸처럼 보이는 소녀는 사실 에블린이 자신의 아버지 노아 크로스에게 당한 근친상간으로 낳은 딸이자 동시에 여동생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고백합니다. "She's my sister, and my daughter (그녀는 내 여동생이자 내 딸이야)"라는 에블린의 절규는 제이크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줍니다.

 

영화는 부패한 권력과 끔찍한 가족의 비밀이 뒤섞여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제이크는 진실을 밝히고 에블린과 딸을 보호하려 하지만, 노아 크로스의 거대한 권력과 탐욕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차이나타운 골목에서 노아 크로스가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에블린의 딸을 데려가고,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는 에블린을 목격한 제이크는 모든 진실을 알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절규하는 제이크에게 그의 동료는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야(Forget it, Jake. It's Chinatown)"라고 말하며, 악이 승리하고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비극적인 현실을 암시합니다.

 

느낀점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모든 악이 결코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는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잭 니콜슨이 연기한 제이크는 비록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인간적인 탐정이었기에, 그가 겪는 좌절과 무력감은 고스란히 저의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파헤칠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며, 결국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 어두운 이면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의 코에 생긴 붕대가 처음에는 사소한 다툼의 상징이었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그가 맞닥뜨린 세상의 부패와 자신의 무력감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에블린 멀웨이라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녀는 매혹적인 팜므파탈인 동시에, 아버지의 추악한 욕망과 남편의 비열함 속에서 고통받은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그녀가 숨기고 싶었던 끔찍한 가족의 비밀을 고백하는 순간, 저는 충격과 함께 그녀를 향한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마치 텍사스 시골 마을의 오래된 저주처럼 느껴졌고, 제이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또한 '로스앤젤레스의 물 문제'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인간의 탐욕과 권력 다툼의 핵심적인 상징으로 활용했습니다. 물이라는 생명의 근원이 어떻게 몇몇 권력자들의 사유물이 되어 다른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 이는 비단 영화 속 1930년대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 즉 '외부인은 결코 이해하거나 바꿀 수 없는 암울한 세계'가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남아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오락 영화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부패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위대한 작품이었습니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끝내겠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님의 엔딩은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야"라는 대사와 함께, 악이 승리하고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주며 극단적인 비관주의와 허무주의를 남깁니다. 이 엔딩은 누아르 장르의 미학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충격을 주었지만, 제가 만약 감독이라면,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주 미약한 진실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엔딩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영화는 에블린의 비극적인 죽음과 노아 크로스가 딸을 데리고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사라지는 장면까지는 동일하게 가져갑니다. 제이크는 무력감에 휩싸여 절규하고,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잊어버려, 제이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이크는 잊지 않습니다. 그는 폐인이 된 채 술에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에블린의 진실과 그 추악한 음모가 끊임없이 불타오릅니다. 어느 날 밤, 제이크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에블린이 마지막으로 "She's my sister, and my daughter"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그는 그 사진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에블린의 눈빛을 다시 마주합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갑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과 사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세상에 밝힐 '수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역사를 기록하듯, 그 모든 자료들을 정리하고 타이핑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타자기 소리는 어둡고 고요한 사무실에 유일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됩니다. 그가 작성하는 것은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언젠가 세상에 알려질 진실에 대한 '증언'이자 '고발'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제이크가 완성한 원고의 마지막 문장이 클로즈업됩니다. 그 문장에는 "세상은 때로 차이나타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곳이지만,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그 어둠을 뚫고 나올 것이다"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그 원고를 단단한 가죽 케이스에 넣어,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깊숙이 숨겨둡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했던 진실이 당장은 빛을 보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다음 세대에 의해 밝혀질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확고한 희망을 품은 채, 고요히 새벽녘의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그의 코에 있던 붕대는 사라졌지만, 그의 눈빛은 세상을 똑바로 직시하며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엔딩은 악이 승리하는 듯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언젠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강렬한 희망을 암시하며, 개인의 비극을 넘어선 역사의 순환적인 정의와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운을 남길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감독에 대해 (로만 폴란스키 감독)

제가 생각하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님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과 권력의 부패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해부하는 데 탁월한 거장'입니다. '차이나타운'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들은 불완전하고 비극적인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고들며, 사회의 위선과 부패를 냉혹하게 그려냅니다. 그는 탁월한 미장센과 치밀한 서스펜스, 그리고 심리적인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연출력을 통해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깊이 끌어들입니다.

 

특히 주인공을 압도하는 거대한 악과 시스템의 부조리 앞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절망 속에서도 진실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는 능력이 독보적입니다. 폴란스키 감독님은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인간 본연의 고뇌와 탐욕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시대를 초월하는 진정한 영화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이 영화가 나에게 미친 영향

'차이나타운'은 제게 '세상의 모든 진실이 반드시 정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불편한 진실과 '권력과 탐욕의 잔혹함'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깨닫게 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개인의 정의감이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선의의 노력이 때로는 더 큰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제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세상의 어둠과 부패를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심어주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제가 불합리한 현실 앞에서 무력감에 빠지거나, 쉽게 타협하려 할 때, 저는 차이나타운이라는 절망적인 공간 속에서도 진실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제이크 기티스의 고독한 투쟁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고 제가 마주하는 모든 사회적 불의 앞에서 침묵하기보다는, 작더라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진실을 찾아나가는 용기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차이나타운'은 단순한 누아르 영화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영원한 질문을 던지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