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인상 평가
미하엘 하네케 감독님의 '아무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감정을 바싹 마르게 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눈시울을 붉히게 한, 참으로 모순적인 경험을 선사한 영화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적인 환상과는 달리, 이 영화는 사랑이 지닌 가장 처절하고도 숭고한 민낯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퇴직한 노부부가 맞닥뜨린 질병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비극을 하네케 감독 특유의 냉철하고도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내데, 그 극도로 절제된 연출 속에서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감정의 파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숨이 막혔지만, 동시에 이것이 진정한 '아무르(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잊을 수 없는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파리의 한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은퇴한 음악 교사 부부, 조르주(장-루이 트린티냥 분)와 안느(엠마누엘 리바 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음악을 사랑하고, 서로를 깊이 존중하며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아한 노부부입니다. 그러나 이 평온함은 어느 날 아침 안느가 식사를 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산산조각이 납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안느는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해집니다.
안느는 병원에서 회복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와 조르주의 보살핌을 받기로 합니다. 조르주는 헌신적으로 안느를 간병하며 그녀의 손발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안느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그녀는 자존심 강했던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두 번째 뇌졸중은 안느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듭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거나,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다는 절망감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 분)는 부모님을 찾아와 안느의 상태를 걱정하고 요양원에 보낼 것을 제안하지만, 조르주는 안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집스럽게 집에서 그녀를 돌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간병은 조르주에게도 심한 육체적, 정신적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안느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조르주의 절망감은 극에 달하고, 결국 그는 아내의 남은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잠든 안느를 베개로 질식사시키고, 그녀의 시신을 정성껏 정리한 후 방을 봉쇄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직접 잡은 비둘기를 창밖으로 날려 보내고, 아파트 문을 걸어 잠근 채 사라집니다. 영화는 그들의 아파트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납니다.
느낀점
'아무르'는 저에게 사랑이 지닌 가장 심오하고도 때로는 잔혹한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단순히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상대방의 존재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극한의 의무이자 헌신이었습니다. 안느의 육체적 쇠락과 정신적 고통을 그대로 감당하며,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격정적인 감정을 보이는 조르주의 모습에서 저는 사랑이 가진 무거운 책임을 보았습니다. 그가 아내의 삶을 끝내는 그 순간은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가 아내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배경 음악과 건조하고 사실적인 촬영 기법은 관객을 그들의 고통스러운 일상 한가운데로 던져 넣습니다.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 안느의 신음 소리, 조르주의 절규 같은 일상의 소음들이 오히려 극의 긴장감과 심리적 압박감을 극대화하며, 저는 마치 제가 그들의 아파트에 함께 갇혀 있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잔혹한 현실에도 무관심했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관찰자 시점과는 반대로, '아무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통의 순간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외부의 개입이 차단된 부부만의 세계를 그려내 더욱 고독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영화는 또한 우리 모두가 언젠가 겪게 될 노년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이의 마음이 어떠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저는 인간의 삶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 쉬이 결론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끝내겠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님의 엔딩은 완벽하게 이 영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제가 만약 감 독으로서 조르주의 마지막 행동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아주 미묘하게 열어두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엔딩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영화의 엔딩 부분, 조르주가 안느를 떠나보낸 후 방을 봉쇄하고 비둘기를 창밖으로 날려 보내는 장면까지는 동일하게 가져갑니다. 아파트가 텅 빈 모습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감독님의 의도를 존중하고 싶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짧게 한 장면을 더 추가합니다. 텅 빈 아파트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서서히 카메라가 조르주와 안느가 즐겨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던 거실의 안락의자를 비춥니다. 그 의자 위에 조르주가 평소에 즐겨 입던 가디건이 마치 그가 앉아 있는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디건 주머니에서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서서히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집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조르주와 안느가 행복하게 웃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진은 잠시 바닥에 놓여 있다가, 아파트의 창문 틈으로 들어온 미약한 바람에 의해 살짝 움직이고, 마치 살아있는 듯한 미소와 함께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 어둠 속으로 스러지는 겁니다.
이러한 엔딩은 조르주가 안느를 따라갔을 것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주면서도, 그들의 '사랑'이 육체를 넘어 영원히 함께하게 되었다는 시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그들의 젊은 시절 가장 행복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마지막으로 스러지는 것은, 고통스럽던 노년의 기억이 아니라 그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아무르'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떠났다는 위안을 관객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전달하며 깊은 여운을 남길 것 같습니다.
결론: 이 영화가 나에게 미친 영향
'아무르'는 제게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깊이를 다시 정의하게 해준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사랑만을 쫓던 제 시선이 얼마나 얕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름다운 순간뿐만 아니라, 가장 추하고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기꺼이 함께 나누고 감당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요.
이 영화가 제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삶과 죽음' 그리고 '존엄성'에 대한 태도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을 때,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어디까지 감내하고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저를 현실의 냉정함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저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노년과 죽음을 마주해야 할 때, 그리고 저 자신의 노년과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 이 영화 속 조르주와 안느의 사랑이 주는 교훈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용기이자 가장 큰 헌신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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