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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인생 이야기

영화 [걸어도 걸어도] 멈추지 않는 삶, 그 안의 미처 다 못한 이야기들

by 영화감있게 살자 2025. 10. 2.

영화 [걸어도 걸어도] 멈추지 않는 삶, 그 안의 미처 다 못한 이야기들

서론: 인상 평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영화는 늘 잔잔한 미소 뒤에 숨겨진 깊은 슬픔과 위로를 안겨주곤 하는데요. [걸어도 걸어도(歩いても 歩いても)]는 그 중에서도 저에게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 중 하나입니다.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인 갈등 없이, 일본의 어느 평범한 가족이 한데 모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만으로도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의 본질을 너무나 섬세하게 포착해냈거든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여온 애증과 이해, 그리고 미처 풀지 못한 회한들이 뜨거운 여름 햇살처럼 스크린을 가득 채우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제 마음속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렸습니다. '인생은 걸어도 걸어도 계속되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잃어가며 살까'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평범함 속의 비범함이 빛나는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요코야마 가족이 바닷가 마을의 낡은 본가로 모여, 15년 전 세상을 떠난 큰아들 준페이의 기일을 기리는 하루를 담아냅니다. 준페이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했고, 가족들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아있죠. 가족들의 중심에는 은퇴한 의사인 권위적인 아버지 교헤이와 겉으로는 자애롭지만 속으로는 많은 회한을 품고 있는 어머니 토시코가 있습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멈추지 않는 삶, 그 안의 미처 다 못한 이야기들

 

이날 본가에 모인 가족들은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 분)와 그의 아내 유카리(나츠카와 유이 분), 그리고 유카리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츠시, 그리고 딸 치나미(YOU 분)와 그녀의 남편, 두 자녀입니다. 특히 료타는 항상 죽은 형 준페이와 비교당하며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살아온 인물이에요. 료타의 아버지 교헤이는 료타가 의사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내비치고, 어머니 토시코는 준페이의 죽음 이후 집안에 감도는 침체된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이 하루 동안 가족들은 함께 장을 보고,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성묘를 가고, 저녁에는 단란한 시간을 보냅니다.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고, 먹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풍경이 주를 이루죠.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 속에는 가족 구성원 각자가 품고 있는 내면의 갈등과 해묵은 감정들이 미묘하게 교차합니다. 아버지는 의사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료타를 압박하고, 어머니는 준페이가 목숨을 바쳐 구한 아이(어른이 되어 나타나는)에 대해 속으로는 원망하는 듯한 복잡한 심경을 내비칩니다. 료타는 아버지와 대화에서 겉돌고, 아내 유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료타에게 힘이 되어줍니다.

 

영화는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 없이 하루가 저물고, 다음날 료타 가족이 본가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떠나기 전 료타는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 동요를 함께 부르자고 제안하지만, 어머니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거절하죠. 버스 정류장에서 본가 방향을 다시 바라보는 료타의 눈빛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부모님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료타의 가족이 부모님 묘소를 찾으러 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료타는 후회합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한두 번만 더 찾아뵐 걸…."이라고요.

 

느낀점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복잡한 감정들로 얽혀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걱정하지만, 동시에 오래된 습관처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회한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왔거든요. 료타가 죽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는 모습, 어머니가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아들을 잃은 슬픔과 구원받은 아이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숨기고 있는 모습은 보는 내내 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한국적인 가족 정서와는 조금 다른,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혹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했어요.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대화들,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덜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삼키는 말들이 쌓여가는 모습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님은 삶의 진실이 거대한 서사나 극적인 장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밥상에서 오가는 시시콜콜한 대화, 여름밤 풀벌레 소리, 그리고 부모님의 주름진 손에서 전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료타가 "한두 번만 더 찾아뵐 걸"이라고 후회하는 마지막 내레이션은, 제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거나 당연하게 여겼던 부모님과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하며 깊은 슬픔과 함께 죄책감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인생은 걸어도 걸어도 계속되지만, 어떤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잔인하게 일깨워주는 영화였습니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끝내겠다

고레에다 감독님의 엔딩은 현재의 삶과 과거의 후회를 교차시키며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감독으로서 이 영화의 메시지를 조금 다르게 강조하고 싶다면, '관계의 화해'와 '과거와의 공존'을 희미하게나마 제시하는 엔딩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멈추지 않는 삶, 그 안의 미처 다 못한 이야기들

 

영화의 엔딩은 료타 가족이 본가를 떠나 버스에 오르는 장면까지는 동일하게 가져갑니다. 버스 안에서 료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츠시(료타의 아들)는 그림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때, 어머니 토시코가 주던 옛날 카스테라 조각(영화 속 작은 에피소드)을 아츠시가 주머니에서 꺼내어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이 짧게 클로즈업됩니다.

 

그리고 료타는 버스 창밖으로 멀어지는 본가를 보다가, 문득 주머니를 뒤적입니다.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어머니 토시코가 그에게 건네주었던 작은 조약돌 (준페이의 무덤가에서 가져온 것). 료타는 그 조약돌을 꽉 쥐고는 눈을 감습니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에는 후회보다는, 알 수 없는 '수용'과 '화해'의 감정이 엿보입니다.

 

이때, 료타의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아직도 여름이 오면 그 집이, 그 여름 냄새가 생각납니다. 어쩌면 저는 영원히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그림자마저도 저의 일부라는 것을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도, 제가 깨닫지 못했던 방식으로 늘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장면은 짧게 '미래'를 비춥니다. 료타가 죽은 부모님과 형의 묘소에 꽃을 놓는 장면. 그러나 이번에는 료타의 옆에 어른이 된 아츠시와 함께입니다. 료타는 아츠시에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삼촌(준페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의 고통과 회한 대신, 이제는 담담하게 그들을 사랑했던 기억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료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과거의 상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힘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면서, 삶은 걸어도 걸어도 계속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픔을 끌어안고 사랑으로 승화하며 나아간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대해

영화 '걸어도걸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진실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장 섬세하고 따뜻하게 그려내는 분입니다. 극적인 사건 대신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소통의 어려움, 관계의 복합성, 그리고 상실과 같은 보편적인 감정을 탁월하게 포착해내시죠.

 

그의 영화는 화려한 연출 없이도 관객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마치 우리 옆집 이야기를 엿보는 듯한 사실적인 시선과 절제된 미학 속에서, 오히려 깊은 공감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특히 따뜻한 음식, 정감 어린 공간, 그리고 잔잔한 유머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을 표현하는 데 천재적이시라고 생각해요.

 

슬픔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긍정적인 시선과, 완벽하지 않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넓은 이해심이 그의 작품 전체에 녹아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순간들에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휴머니스트 감독입니다.

 

결론: 이 영화가 나에게 미친 영향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제게 '가족'과 '시간'에 대한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물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어른으로서 부모님 세대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자식으로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놓치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존재, 그리고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새삼 깨달았거든요.

이 영화가 제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후회'를 줄이기 위한 '지금'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는 것입니다. 료타가 부모님의 죽음 이후 "한두 번만 더 찾아뵐 걸"이라고 후회하는 모습은 저에게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진심을 전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간직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삶은 멈추지 않고 걸어가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발자국을 더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 그것이 이 영화가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