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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인생 이야기

영화 [이다] 흑백 필름 위의 묵직한 발자국

by 영화감있게 살자 2025. 10. 14.

영화 [이다] 흑백 필름 위의 묵직한 발자국

서론: 인상 평가

영화 '이다'는 스크린에 비치는 첫 순간부터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각적, 정서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흑백의 미학적 선택과 4:3의 좁은 화면비는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보는 듯한 아련함을 주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파고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960년대 공산주의 폴란드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수도원에서 자라온 수녀 지망생 '안나(이다)'가 자신의 유대인 혈통과 숨겨진 가족사를 발견하는 여정은, 한 개인의 정체성 탐구를 넘어 망각된 역사를 조용히 직면하게 만드는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제된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진실의 무게를 깊이 있게 다룬, 아름답지만 가슴 저릿한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1962년 폴란드의 한 수녀원에서 시작됩니다. 곧 서원을 하고 평생을 수도자로 살아가게 될 젊은 수녀 지망생 '안나'는 원장 수녀의 권유로 유일한 혈육인 이모 '반다'를 찾아가게 됩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안나는 세상에 대한 낯선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이모를 만나러 갑니다.

 

이모 반다는 과거 공산주의 체제에서 재판관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쳐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안나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전합니다. 안나의 본명은 '이다 레벤슈타인'이며, 안나는 유대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홀로코스트 시기에 살해당했다는 것입니다. 안나는 자신의 부모가 홀로코스트 당시 폴란드 시골에서 폴란드인에게 살해당하고 은밀히 매장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공산주의 폴란드에서 철저히 은폐되던 비극적인 역사였습니다.

 

영화 [이다] 흑백 필름 위의 묵직한 발자국

 

이다와 반다는 함께 낡은 차를 타고, 이다의 부모님이 묻힌 곳을 찾아 여정을 떠납니다. 이모 반다는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이다를 대하지만, 그 이면에는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자신이 과거 행했던 선택들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안고 있습니다. 여정 속에서 이다는 재즈 음악을 듣고, 낯선 남자와 만나고, 속세의 삶을 경험하며 자신의 내면과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가족이 살해당한 시골 마을에 도착하고, 마을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부모님의 시신이 묻힌 장소를 찾아 유대교식 장례를 치러줍니다.

 

가족의 유해를 매장한 후, 이모 반다는 자신을 짓누르던 과거의 무게와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 앞에서 결국 비극적인 선택을 합니다. 홀로 남겨진 이다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지만, 이모와의 여정을 통해 얻은 세상에 대한 경험과 자신의 숨겨진 뿌리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이다는 잠시 수도복을 벗고 속세의 옷을 입은 채 삶의 자유로운 유혹들을 경험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삶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다시 수녀복을 입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그녀의 걸음은 불확실하지만, 자신의 모든 과거와 현재를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듯합니다.

 

느낀점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개인의 삶과 역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안나(이다)는 수도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순수하게 자라났지만, 그녀의 혈통과 숨겨진 과거는 그녀를 1960년대 폴란드의 아픈 역사와 강렬하게 연결시키거든요. 흑백 화면과 정적인 구도 속에서 오고 가는 최소한의 대사는 오히려 더 큰 무게감을 주었고, 그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고통과 내면의 갈등은 마치 제 심장을 옥죄는 듯했습니다.

 

특히 반다 이모의 삶이 저에게는 가장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한때 이념에 충실했던 검사이자 동시에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죄 없는 이들에게 비극을 안기면서도 스스로 고통받았던 역사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이다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반다 이모의 모습은 역사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고 잔혹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어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 [이다] 흑백 필름 위의 묵직한 발자국

 

이다의 마지막 선택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유혹을 경험했지만, 결국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이는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모든 것을 경험하고 깨달은 후에 '스스로' 내린 가장 주체적인 결정임을 보여주는 듯했어요. 외부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다의 모습은 저에게도 자신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흑백 필름 위에 고독하게 새겨진 이다의 발자국은 삶의 진실과 존엄성을 찾아가는 우리의 끝나지 않는 여정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끝내겠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님의 엔딩은 이다가 다시 수녀복을 입고 길을 떠나는 모습으로,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과 선택을 받아들였음을 묵묵히 보여주며 깊고 정적인 여운을 남깁니다. 이 엔딩은 영화의 주제와 미학을 완벽하게 완성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감독이라면, 이다의 경험과 이모 반다의 삶이 어떤 형태로든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조금 더 명확한 메시지를 담은 엔딩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이다가 속세의 삶을 경험하고, 반다 이모의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수녀복을 입고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장면까지는 동일하게 가져갑니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 더 이상 고뇌하거나 방황하는 것이 아닌, 깊은 평화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단단함이 서려 있습니다. 그녀의 옆에는 작은 배낭 하나가 있는데, 그 안에는 반다 이모의 유품 중 하나였던 낡은 수첩과 펜이 들어 있습니다.

 

이다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며, 여정에서 마주했던 풍경들과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수첩을 꺼냅니다. 그녀는 수첩에 반다 이모가 해주었던 이야기들, 그들의 가족사에 대한 진실, 이모와의 대화들, 그리고 속세에서 경험했던 아름다운 것들과 추악한 것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변화들을 조용하고 침착하게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이모 반다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듯이, 이다도 이제 자신의 목소리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녀의 글쓰기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정리하는 치유의 행위이자, 동시에 언젠가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증언이 됩니다.

 

마지막 컷은 이다가 수녀복을 입고, 자신이 직접 쓴 수첩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입니다. 그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고독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 묵직한 의미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카메라가 점차 멀어지면서, 이다의 모습은 흑백의 드넓은 폴란드 대지 위에서 작은 점이 되지만, 그 점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음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러한 엔딩은 이다의 개인적인 고통과 선택이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져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 망각된 진실을 보존하는 숭고한 행위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절망적인 역사 속에서도 인간적인 기록과 그 전달이 갖는 힘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에 대해

영화 [이다] 흑백 필름 위의 묵직한 발자국

 

제가 생각하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님은 흑백 미학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조명하며,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탁월한 거장입니다.

 

'이다'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연출은 불필요한 서사와 과장된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인물들의 표정, 침묵, 그리고 프레임 하나하나가 가지는 미묘한 구도와 배치만으로도 깊은 심리적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그는 역사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서 고뇌하고 성장하는 한 인간의 섬세한 드라마를 놓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합니다.

 

또한 종교와 세속, 희생과 자유, 개인과 역사라는 보편적인 주제들을 은유적으로 다루며,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님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진정한 영화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이 영화가 나에게 미친 영향

'이다'는 제게 '잃어버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과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깨닫게 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 형성되고, 또 그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과정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제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자유로운 선택은 단순히 외부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마주하고 책임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심어주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세상의 소음에 휩쓸려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저는 수도원 밖의 화려한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아 고독하게 걸어갔던 이다의 단단한 뒷모습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고 제가 외면하고 있는 혹은 미처 알지 못하는 저의 역사와 진실들이 무엇인지 용기 있게 탐구하고, 그 안에서 저만의 길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