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인상 평가
'시'라는 제목은 듣는 순간부터 순수하고 아름다운 울림을 예상하게 했지만,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시'는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인간 삶의 가장 추악하고 잔혹한 현실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2009년 제63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노년의 미자라는 인물이 시를 통해 '사물을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조용하고 묵직하게 담아냅니다.
영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 깊숙이 침잠하는 감정의 결들을 쫓아가며,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며, 과연 삶의 어떤 지점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는지 묻는 듯했습니다. 진흙 같은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아름다움에 머무르고자 한 미자의 고독한 투쟁은, 저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울림을 남긴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경기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60대 여성 양미자(윤정희 분)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녀는 요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며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지만, 이따금씩 찾아오는 기억력 감퇴 증세에 불안해합니다. 평소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미자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 강좌'를 수강하며 난생처음 '시'의 세계에 발을 들입니다.
시 강사 김용탁은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 이라며, 수강생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기록해 오라고 숙제를 내줍니다. 미자는 딸에게도 "꽃을 좋아하고 엉뚱한 소리를 잘 하기 때문에" 시인 같다는 말을 듣는 등, 순수한 마음으로 시의 언어를 찾아 노트를 들고 다니며 일상의 단어들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은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산산조각 납니다. 중학생인 외손자 종욱(이대환 분)이 또래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하여 자살에 이르게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미자는 손자의 친구들 아버지들이 모여 이 사건을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돈'으로 무마하고 은폐하려 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피해 여중생의 홀어머니와 합의하기 위해 각각 500만원씩을 부담하기로 하지만, 미자는 손자의 추악한 죄 앞에서 도피하려는 듯 딴청을 피하며 책임지기를 주저합니다.
자신이 발견하려 애썼던 삶의 아름다움과 손자가 저지른 잔혹한 현실의 추악함 사이에서 미자는 깊은 혼란과 고통에 빠집니다. 시를 통해 사물을 똑바로 보고자 할수록,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미자는 손자의 죄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도덕적인 번뇌를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를 통해 이 모든 고통과 비극을 담아내려 합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미자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시를 완성하는 모습을 통해, 삶의 추악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죄와 구원의 의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됩니다.
느낀점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움'이 얼마나 잔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시'가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를 깊이 느꼈습니다. 미자가 겪는 알츠하이머 증상은 그녀가 잃어버리는 기억의 파편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동시에 현실의 진실이 얼마나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를 은유하는 듯했습니다. 순진하게 시를 쓰며 아름다운 단어들을 찾아 헤매던 그녀가 손자의 끔찍한 죄와 마주했을 때, 그 상실감과 절망감은 고스란히 저의 마음을 관통했습니다.
가장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미자가 시를 통해 손자의 죄를 속죄하고, 그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손자의 죄는 추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미자는 '시'라는 가장 순수한 예술을 통해 그 비극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는 단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 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졌습니다. 끔찍한 현실 앞에서 미자가 보여주는 나약하지만 강인한 내면의 움직임은, 그 어떤 폭발적인 감정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죄의식 없는 가해'와 '무책임한 은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어른들의 위선은 미자가 찾아 헤매던 시적 아름다움과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어,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가 그 모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 시를 완성하는 모습은, 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구원을 찾으려 한다는 희미하지만 강렬한 희망을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미자가 남긴 시의 의미와 그 안의 여운이 오랫동안 저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끝내겠다
이창동 감독님의 엔딩은 미자가 자신의 시를 완성하고, 그 시가 비극적인 현실과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울림과 질문을 남깁니다. 이 엔딩은 그 자체로 미학적이고 주제 의식적으로 완성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감독이라면, 미자의 '시'가 단순한 개인의 성찰을 넘어, 그 비극의 '증언'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엔딩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영화는 미자가 자신의 시를 완성하고 읊조리는 장면, 그리고 그녀의 시가 과거의 비극적인 순간들과 오버랩되는 장면까지는 동일하게 가져갑니다. 하지만 영화는 미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그녀가 남긴 '시' 자체에 집중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의 장면을 비춥니다. 한적한 공원 벤치에 낡은 시집 한 권이 놓여 있습니다. 시집의 표지에는 '미자'라는 이름과 함께 그녀의 시들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시집의 한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 페이지에는 미자가 손자를 위해, 혹은 희생된 소녀를 위해 바쳤던, 고통 속에서 피어난 가장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적혀 있습니다.
그때, 젊은 여학생 한 명이 벤치에 앉아 그 시집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호기심에 시집을 펼치고 미자의 시를 읽기 시작합니다. 시를 읽는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에는 의아함이, 이내 깊은 감동과 이해의 표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 여학생은 과거 희생된 소녀의 동생이거나, 혹은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에 고통을 품고 있던 지역 주민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여학생은 시를 다 읽고, 그 시집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슬픔을 넘어선 어떤 '결심'과 '새로운 희망'이 엿보입니다. 그녀는 시집을 들고 어디론가 향합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단호하며, 마치 시가 준 용기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려는 듯 보입니다. 예를 들어, 희생된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가거나, 혹은 그 시를 통해 당시 사건의 진실을 다시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컷은 그 여학생이 걸어가는 뒷모습, 그리고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을 보여줍니다. 이때, 미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시 구절이 다시 흘러나옵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단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것은 다시 피어날 거야." 이러한 엔딩은 미자의 시가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 망각된 진실을 일깨우고, 그 고통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작은 변화와 희망을 불어넣는 '증언'이자 '연결'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더욱 감동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여운을 남길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창동 감독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이창동 감독님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회적 현실의 모순'을 가장 깊고 섬세하게 파고드는, 한국 영화계의 독보적인 거장입니다. '시'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들은 화려한 연출이나 자극적인 스토리보다는,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의 파고와 그들이 마주하는 불편한 진실을 묵직하게 담아냅니다.
그는 폭력이나 불의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작은 희망과 고귀한 정신을 놓치지 않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합니다. 특히 '삶을 제대로 본다'는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를 예술적 성찰과 연결시키는 그의 연출은, 관객에게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깊은 질문과 성찰을 던지게 합니다. 이창동 감독님은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드라마를 가장 진솔하고 철학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진정한 영화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이 영화가 나에게 미친 영향
'시'는 제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와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깨닫게 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아름다움 이면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극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제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세상의 추악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 자체가 가장 숭고한 행위'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심어주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삶의 불의나 불편한 진실 앞에서 눈을 감거나 도피하고 싶을 때, 저는 손자의 잔혹한 죄를 마주하고 그 모든 고통을 시로 승화하려 했던 미자의 고독한 뒷모습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고 제가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며, 제 목소리로 저만의 시를 써나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한 노년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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