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이라는 단어를 미리 떠올려보다
저는 아직 퇴직을 앞둔 나이는 아닙니다. 매일 출근하고, 회의하고, 메일에 답장하는 일상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시기인데요. 가끔은 문득 생각하게 돼요. “내가 퇴직을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일이 없는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 시간을 잘 살아낼 수 있을까?”
퇴직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수십 년간 쌓아온 사회적 역할과 일상의 리듬을 내려놓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이 오면 저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자유로움일까요, 허무함일까요, 아니면 막막함일까요.
영화 [끝난 사람]은 그런 상상을 현실처럼 끌어당겨줍니다. 퇴직 후의 삶이 어떤 감정으로 채워지는지,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조용하지만 깊게 보여주는 영화였어요.
줄거리 — 끝난 사람, 혹은 다시 시작하는 사람
영화의 주인공 오사케는 대형 은행에서 정년퇴직을 맞은 평범한 가장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엘리트였지만, 좌천되고, 밀려나고, 결국 63세에 퇴직하게 돼요. 그 순간부터 그는 ‘끝난 사람’이 됩니다.
퇴직 후의 삶은 생각보다 낯설어요. 아침에 일어나도 갈 곳이 없고, 아내는 여전히 바쁘게 일하는데요, 자신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공원을 배회합니다. 그의 모습은 어딘가 구차하고, 쓸쓸해요. 하지만 그 감정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해요.
그는 문학을 공부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다시 살아가려 애씁니다. 실패도 겪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끝난 사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느낀 점 — 나도 언젠가 그 길을 걷겠지
영화를 보며 생각했어요. 저는 아직 퇴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그 순간이 오면 저도 오사케처럼 혼란스럽고, 작아지고, 외로워질지도 모르겠어요. 일이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제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였고요, 그걸 잃는다는 건 제 존재의 일부를 잃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구요.
퇴직 후의 삶은 단순히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정의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해왔던 일, 제가 맡았던 역할, 그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저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저를 다시 발견할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것,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것, 제가 진짜 누구였는지를 조용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오사케가 문학을 공부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모습은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 “퇴직하고 나니, 내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더라”
몇 년 전, 아버지의 친구분이 정년퇴직을 하셨어요. 대기업에서 35년 넘게 근무하셨고, 부장으로 퇴직하셨습니다. 회사에서는 꽃다발도 주고, 동료들은 박수도 쳐줬는데요, 그날은 분명 축하받는 자리였지만, 그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조용히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고 해요.
처음 며칠은 자유로웠다고 하셨어요. 아침에 늦잠도 자고, 아내가 차려준 밥도 여유 있게 먹고, TV도 보고, 동네 산책도 하셨다고 해요. 하지만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자, 아내는 “이제 뭐 할 거야?”라고 물었고요, 그 질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자신이 뭘 좋아했는지, 뭘 잘했는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그는 말하길, “회사에 있을 땐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았어. 부장이라는 이름이 나를 대신해 줬거든. 근데 그 이름이 사라지고 나니까,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더라.” 그분은 한동안 무기력했어요. 아내와도 자주 다투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습니다. 하루 종일 TV만 보거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퇴직 후 글쓰기’라는 무료 강좌를 발견하셨다고 해요. 별 기대 없이 등록했는데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써보세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엔 쭈뼛쭈뼛했지만, 자신이 겪은 회사 생활, 좌천됐던 경험, 후배에게 배신당했던 기억, 그리고 퇴직 후 느낀 공허함까지 조금씩 글로 풀어냈어요. 그 글을 읽은 강사와 동료들이 “진짜 공감돼요”, “이런 이야기 더 써주세요”라고 말해줬고요, 그때 처음으로 “아, 나도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퇴직 후에도 나는 나답게
아직 퇴직은 먼 이야기지만, [끝난 사람]을 보고 나니 그 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준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퇴직 후에도 배우고 싶고, 글을 쓰고 싶고,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요. 그때가 오면, 저는 ‘끝난 사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그리고 그 시작은 지금 이 순간, 제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몰라요. 퇴직은 끝이 아니라, 제가 저를 다시 만나는 시간일지도 모르거든요.
그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저는 오늘도 저를 조금씩 준비해 봅니다.
원작 소설 정보
제목: 끝난 사람 (終わった人)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
이 소설은 도쿄대 출신의 엘리트 샐러리맨이 정년퇴직 후 겪는 정체성의 혼란, 사회적 고립,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퇴직 이야기가 아니라, 노년의 자아 찾기와 삶의 재정의를 중심으로 전개돼요.
영화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주인공 오사케가 퇴직 후 겪는 감정과 변화, 그리고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특히 원작의 깊은 내면 묘사를 영화에서도 잘 살려서, 퇴직을 앞두거나 인생의 전환점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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